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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3 제주여행 4일차, 마무으리
  2. 2015.09.02 제주여행 3일차, 탄다
  3. 2015.09.01 제주여행 2일차, 제주 할망

아침에 일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는 조식, 오니기리와 된장국을 먹고 나왔다. 동네 카페에 가서 가자마자 있을 촬영을 위해 몇 가지 일을 하였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는데 낮은 산과 나무들이 가득 보였다. 그 사이로 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속으로 나즈막히 말해보았다. 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한 대가 지나가다니, 줄줄이 신호대기에 걸려있는 것도 아니고, 줄줄이 버스전용차선을 달리는 것도 아니고 한 대가 지나가다니! 그리고 얼마 뒤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갔다. 여기까지 여행을 온 것은 이런 속도를 느끼기 위한 게 아닐까. 내가 따라가고 있던 속도만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기 위해서 이 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노트북으로 다다다다. 


동네에 짱 박혀 있었지만 돈을 꽤 쓴 것 같다. 하루 두 번 카페에 가면 크림치즈베이글까지 해서 15,000원. 밥값은 기본이 10,000원이고 조금 맛있는 걸 먹으려면 16,000원은 내야 한다. 하루 두끼. 그리고 동네에 서점이 있다는 이유로 읽을 책을 안 가지고 온데다 집중해서 읽다보니 금방 읽어버려서 두 권이나 샀다. 그리고 어제 오름과 숲을 다녀오는 길에 힘들어서 택시로 이동. 그리고 간간이 기념품과 소품 득템. 그래도 합쳐보면 얼마 되진 않지만 내가 한 소소한 행동에 대한 값치고는 꽤 비싼 편이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나 맛있는 걸 먹어야지 하면서 이 동네의 맛집을 향해 오랫동안 걸었다. 도착하니 주인장들께서 휴가.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메모를 보고 조금 더 직진했더니 사람들이 우글우글한 집 도착. 제주에서 먹고 싶었던 보말국을 파는 집을 발견했다. 대평리에서 먹은 국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시 동네로 가려니 햇볕이 너무 강해 해변 정자에 누웠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면서 한참. 파도소리, 차 한 대 지나가는 소리, 동네 사람이 타는 게 분명할 자전거 삐걱대는 소리, 다시 파도소리, 파도소리. 솨아악. 생각해보니 여행 와서 한 번도 음악을 플레이 하지 않았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여기 도착해서도 한 번도 내 이어폰으로 음악은 듣지 않았다. 카페의 음악이나 분식집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만 들었다. 이어폰으로 야구 중계는 좀 들었다만. 여튼. 나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걸 인지하고도 듣고 싶은 음악이 없었다. 어제 간 카페 주인장의 말대로 편안한 여행을 하고 있나보다. 그런 게 얼굴에 드러난다고 말했었다. 


책은 두 권 사서 읽었다. 여기 오면 동네 책방에서 사서 읽어야지 했던 [모든 요일의 기록]은 그날 밤 다 읽었다. 어떡하지. 또 책을 사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리면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 가방이 너무 무거울 것 같았다. 두 번째 책은 하루 안에 읽기 어려울 것 같은 두꺼운 소설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샀다. 이전부터 여러 번 봤지만 뭔가 안 끌려서 읽지 않았는데, 여행와서 읽기는 좋을 것 같았다. 두꺼워서 샀는데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을 뻔 했다. 조금 참으면서 나눠 읽고 조금 전에 카페에서 마저 다 읽는 행복을 누렸다. 마침 지금 카페에는 정원영 5집이 나온다. 


이번 여행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도 지금은 잘 판단하기 어렵다. 딱히 뭔가 한 것도 없다. 게스트하우스라 긴장했는지 밤마다 잠도 깊이 들지 못했다. 어젯밤엔 괴기스런 꿈 하나와 고양이들을 죽여서 음모를 꾸미는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의 편을 들어주는 박서울시장이 나오는 꿈을 꿨다. 낮에 길에서 죽은 고양이를 봐서 꾸게 된 꿈인 것 같다. 화장실도 편하지 않아서 제대로 못갔다. 길가다 방구를 꼈는데 동네가 너무 조용해서 뒤따라 오던 여자가 들어버리는 사고(일상이 아닌)도 있었다. 그럼 이번 여행이 어땠다고 말할 수 있을가. 아직 완벽하게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음, 내일이면 돌아가니까, 생각해보면...


그래. 편안한 얼굴을 한 여행이었다. 그 정도이다. 더는 없다. 






Posted by cox4 :

제주의 한 동네에 짱 박혀서 이틀을 보냈다. 오늘은 나돌아 다니고 싶어서 버스를 타러 갔다. 정류장에 붙은 버스시간표를 보니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땡볕이다. 길 건너 초등학교 돌비석이 만든 작은 유일했다. 그늘 속에 몸을 다 구겨넣기 위해 철퍼덕 도로가에 앉았다. 그늘은 소중하다. 그 때 한 할아버지가 길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사는 삶은 어떨까? 그것도 노인으로서 산다면. 심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나를 보고 길을 건넌다. 나를 보지 않는 척 했지만 분명히 내가 타깃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늘에 앉아있었더니 이번엔 할아버지가 오는 건가. 할망은 좋지만 할아버지는 싫다는 생각에 일어서려는데, 할아버지 이미 도착해 웃으며 말을 건네신다. 그늘이 여기 밖에 없네. 


오늘도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서 묵었는지, 지금은 어디로 가는 지 묻는 말에 차례로 대답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 잠시 여기 사신다는 할아버지는 차를 근처에 세워놓고 쇠소깍에 놀러가신다고 했다. 용문이 오름에 간다고 하니 거긴 볼 게 없다고 쇠소깍에 같이 가자고 하신다. 나는 오름을 가보고 싶었다며 거절하는데, 할아버지 심심하다며 자기 차를 타고 다니자고 하신다. 곤란해하던 차에 버스가 와서 얼른 탔다. 할아버지도 탔다. 할아버지는 누가 자리를 양보해줘서 바로 앉았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을 걸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창밖만 보고 갔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나 뒤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내리셨다. 쇠소깍이 되기도 전인데! 나도 내릴 때가 된 것 같은데 하면서 찾아보니 나는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이런. 버스에서 내려 다시 반대편 버스를 타고 돌아왔더니, 숙소에서 나온 지 2시간만에 거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이니까. 가고 싶었던 오름은 그래도 기다려주니까. 


오름에 올랐다. 숲에도 갔다. 눈도 마음도 시웠했다. 얼굴과 팔다리가 시커멓게 탔다. 



Posted by cox4 :

알람을 맞춰놓지 않고 늦게까지 잤다. 청소 소리에 깼다. 이틀 숙박이라고 하더라도 아침 10시엔 나가야 한단다. 청소하는 스탭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씻고 도망가듯 나왔다. 야박한 규정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부지런을 떨 것 같다. 쫓겨나듯 숙소에서 나와 어젯밤 찾아둔 맛집에 갔다. 이스트이스트. 전화로 지민과 수다 떨면서 갔더니 금세 도착했다. 구름이 잔뜩 꼈던 어제와 달리 쨍한 하늘. 짧은 반바지 하나 챙기길 잘했다.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사람이 우글우글할 줄 알았는데 오픈 직전이라 그런 지 아무도 없다. 제주는 제주다. 서울의 맛집과는 손님 밀도가 다른 것이다. 버스도 없어 20분 정도 걸어 왔더니 땀이 송송. 동네 어귀에 있는 튼튼한 나무 아래 앉았다. 좋다. 조용하다. 시원하다. 바람이 분다. 그러고 있는데 일 나가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렸다. 할머니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아가씨여 아줌마여?

아가씬데... 나이는 아줌마 나이예요.


멋쩍게 웃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부모님은 계신지, 몇 째인지 묻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밭일 나갔다 들어오신 할머니 얼굴에도 땀이 송송하다. 얆은 피부를 뚫고 나온 실핏줄이 선명하다. 작은 코에 유난히 집중된 실핏줄이 신기해 자꾸 시선이 갔다. 할머니 대뜸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우리 아들이랑 한 번 만나볼텨? 우리 아들이 셋인데 막내가 결혼을 안했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우리 아들이 결혼을 안 해. 눈이 높아. 돈은 잘 벌어. 시에 집도 있고 차도 두 대여. 기사 한 명 월급 210만원씩 주면서 있고. 한 달에 천만원도 벌어. 삼다수 정수기 사업하는데 한 건에 50만원씩 벌어. 근데 결혼을 안 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짧은 반바지를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도 끈질기게 자기 아들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려와서 애만 낳고 키우면 된다고 돈은 잘 번다고.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는 아들이 참 말을 안듣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저한테. 아드님도 다 알아서 하실텐데...


어느 정도에서 수습은 해야할 것 같아서 몇 마디 꺼내봤지만, 전화번호를 주고 가라신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아들이 37살이라고 한마디 보태신다. 어색하게 웃고만 있다가 할머니가 일어나는 틈에 나도 얼른 일어났다. 또 전화번호 주고 가라고 해서 생각 있으면 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 나무 보고 찾아오라고 하신다. 알았다고 했다. 결혼 안 한 자식을 둔 부모는 다 이러는 것인가. 그 아들은 도대체 어떻게 처신했길래 할머니가 길에서 멍 때리고 있는 아무 여자를 잡는 것인가. 그래도 제주 할망과 처음 나눈 대화라 재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밥 먹고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갔다. 이것저것 밀린 잡일을 하였다. 혼자 여행 온 여자들이 나처럼 멍 때리고 있었다. 잠깐 밖에 나가 전화를 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는데 종아리가 내 손목보다 가는 할머니가 내 손가락보다 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내 옆에 앉으셨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묻는다. 또 혼자서 왔다고 서울서 왔다고 열심히 대답했다. 애인을 묻는다. 없다고 하니 내 눈을 지그시 보시면서 어디 묵냐고 하신다. 그 게스트하우스는 얼마냐고 하고 밥은 주는 지 묻는다. 거기는 싼 편이라고 저 위는 4-5만원 한다고 했다. 아침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손주는 이미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어디 사장이고 아들 둘을 낳고 산다고 했다. 그 뒤로도 많은 말을 했는데 사투리가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어나서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저기 보이는 하얀 집이 자기 집이라는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잘 놀다 가라고 인사를 하고 가셨다. 나같은 여행 뜨내기들을 많이 상대해 본, 쿨한 인사였다. 


나무 밑에 멍 때리고 있으면 동네 할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아들도 소개 받을 수 있는 곳이 제주다. 넉넉하다.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