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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2010. 3. 17. 13:48 from 또는 외면일기
그저께 혜미 언니 집에 갔다가 탁자에 놓인 미셸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조금 읽었다. 한 두 번 읽었다고 말하기가 무색하게 내용이 생소했다.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어 문제를 크게 만들거나 우울한 감정을 증폭시키는 내가 싫어서, 또 타인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내가 못마당해서 나도 외면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히 적으려고 노력했는데, 요즘엔 전혀 못 적고 있다.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다. 버겁다기보다는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좋지 않은 신호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의무감으로라도 외면일기를 적어볼 생각이다. 외면일기가 아니더라도 외부의 자극에서 시작된 생각을 많이 하고 싶다.

어제 새벽 라디오 방송 '심야식당'에서 대중가요대상 일렉트로닉 부문 후보곡들을 죽 들려주었다. 브아걸의 아브라카다브라가 지누의 곡이라고 했다.

전철을 타고 아브라카다브라가 나오는 엠피삼에 매달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내 앞에 50대로 보이는 아줌마 세 분이 나란히 앉아계셨다. 다른 두 분과 달리 귀걸이도 커다란 보석반지도 없는 한 아줌마가 고개를 숙이고 졸고 계셨다. 그런데 눈썹이 두 줄이다. 푸르게 한 눈썹 문신이 위쪽에 있고 그 아래에 원래 눈썹이 무성히 나있었다. 문신을 했는데 자라나는 눈썹털을 깎지 않으셨나보다. 눈썹 문신을 한 엄마가 생각이 났다. 엄마는 매일 눈썹을 미는 걸까?

아줌마의 손에 굵은 주름이 가득하다. 내 손에도 언젠가는 주름이 생기겠지. 갑자기 무서워졌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지는 않겠지. 천천히 주름이 생겨나고, 나도 늙는다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죽음을 내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나도 주름 가득한 손을 갖게 되겠지. 예전에 미여세 방송하면서 만난 어르신들 모임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난다. '세월이 가면 누구나 노인이 된다.'

그 아줌마의 머리 위 광고판에 인력광고 전단이 끼워져있다. '중소기업 여사장, 남녀 직원 00명 급구, 면접처: 보신각 옆, 급여: 남 230만원, 여 120만원, 연령 38세~65세....' 왜 여사장은 여자들에겐 저렇게 적은 돈을 주는 걸까. 한 달에 230만원을 고정적으로 벌게 된다면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의욕을 느낄까?

아침 늦게 일어나서 밥을 하고, 젖은 머리카락이 마르길 기다리며 미역국을 끓였다. 밥을 먹을 때는 '지붕 뚫고 하이킥'을 자주 보는데 요즘 정음이가 안쓰럽다. 기댈 구석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밀치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밀치고 나가도 맞아주는 데가 없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텅빈 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울린다. 20대가 발랄하기가 왜 어려운지, 지붕킥 초기에 더 없이 발랄했던 정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개청춘]에 연애 이야기가 왜 뒷전인 지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가 발랄하기를 원한다. 진심으로...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 지붕킥에서 갑자기 발랄해지는 정음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으나, 정음이 나이가 든 중년이 되어서 모든 것에 불안해하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해주는 것은 기대해보고 싶다. 지붕킥에는 안 나와도.

GV를 다니면 사람들이 언제까지 이 일을 할거냐고 많이 묻는다. 어제도 누군가 물었다. 재미가 없어지면 다른 일을 하지 않을까라고 많이 대답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해서 가족에게 손 벌리게 되는 날이 오면, 이 일이 재미가 있더라도 두말 없이 돈 버는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돈을 버는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어도 정음처럼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공허한 메아리만 듣게 되면 어떡할까 살짝 불안한 요즘이다. 정음이처럼 정수기라도 팔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