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만 참으면 될 것 같은데, 그걸 못 참아 후회할 일을 만든다. 하지만 참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내 안에 그 한마디가 이미 생겨났다. 입을 다물어 감추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 계속 생겨나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품이 넓지 못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하루하루 후회와 자책과 미안함을 반복하며 품을 억지로 넓혀나가는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넓어지면 좋겠는데, 한 템포만 늦출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한 번에 성취하고 싶은 욕심. 내일, 모레, 일년, 이년이 지나면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 믿고. go.
저녁이 있는 삶이냐, 없는 삶이냐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마무리 된다. 오늘은 오전 촬영을 하고 오후엔 작업실에서 이것저것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저녁엔 집으로 넘어와서 또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40분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응답하라1998' 1회를 보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적고 있다. 오늘처럼 저녁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날은 대게 일기와 독서로 하루를 마무리 하고 2시 전에는 잔다. 저녁 시간이 일과 약속으로 채워져 있으면 집으로 돌아와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예능을 보거나 트위터나 페북의 타임라인을 바쁘게 훑다가 3-4시가 되어야 잔다. 더 여유가 있는 날에는 그 모든 것을 저녁 이전에 끝내고 밤에는 빨래를 개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상을 치우거나 종이 일기를 쓴다.
여유가 있는 삶이냐, 없는 삶이냐에 따라 만나는 사람과 하는 이야기도 다르다. 여유가 있으면 일적인 관계 외의 사람들도 자주 만나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여유가 없으면 일로 만난 사람들과 만나 일도 하고 요즘 본 TV나 영화, 사건사고에 대한 느낌을 빠듯하게 주고 받는다. 요즘의 나는 빠듯한 쪽이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도 몇 달째 못 만나고, 몇 달전부터 가고 싶던 만화방과 카페도 못 가고 있다. 만나자는 약속은 열 개도 넘게 남발해놓았다. 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라, 밥 사준다는 약속도 남발했다. 그래도 예전과는 조금 다른 것이 일보다 그런 약속을 조금 더 우선 순위에 놓을 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혼자 충전하는 시간이고, 마지막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삶을 나누는 것이 내 인생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조금씩이라도 변해가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은 삶의 방식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여유가 더 있다면 좋겠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식이 다 마음을 누르는 종류의 것들 뿐이다. 필사적으로 확보해 둔 마음의 공간을 현실의 뉴스가 다 잡아먹어버린다. 마음의 공간이 더 넓었다면, 한 숨 한 번 깊이 쉬고 다시 편안해질 수 있을텐데...내가 초조해지니 세상 모든 일이 짜증나게 느껴지는 순간도 늘어난다. 무엇을 원하기에 초조해지는 걸까. 짜증난 마음을 달래려면 한참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얻지 못하면...다시 짜증이 나는 악순환.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해야하는 것들에게서 자유로운, 반나절의 여유만 있다고 해도 삶의 질은 달라진다. 일기의 호흡도 고를 것이다. 지금처럼 핑픽폭퍽이 아니라.
오늘은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잠들고 싶다. 그러면 내일의 텅빈 세계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하루씩, 하루씩이다.
주말마다 강의가 있어서 대구에 내려간다. 엄마, 아빠는 가게가 바빠서 내가 내려가도 시간이 없어서 같이 놀지는 못한다. 일요일에 쉬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을 종종 같이 먹는 정도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엄마, 아빠랑 저녁을 먹었다. 생일을 맞아 저녁을 쏜다고 했던 약속을 지켰다.
엄마는 내가 내려왔다고 전화를 하면 냉장고에 뭘 뒀으니 먹으라고 한다. 근데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알고 맞춰서 둔다. 어제는 곶감이었다. 곶감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하는데 엄마는 그걸 까먹지 않았다. 중국산 곶감이 많고 국내산 곶감도 맛없는 게 많아서 곶감을 살 때 신중하게 고르는 편인데, 엄마가 사둔 곶감은 엄마 옆 가게 할머니의 친구가 집에서 직접 만든 곶감이었다. 완전 고퀄리티에 엄청 싸게 팔아서 얼른 사왔다고 했다. 소량이라서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한다. 엄마가 곶감 사뒀다는 이야기에 수업 내내 집에 가서 곶감 먹을 생각만 했다.
엄마랑 같은 방에서 잤다. 방이 건조해서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아침 무렵 옆에서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오른손을 가만히 잡았다. 잠결인데도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리고 손을 놓지 않고 한참 있었다. 기도하나보다. 그러고 나는 그대로 잠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장면을 떠올려봤다. 아기였던 둘째가 어느새 자라서 이렇게 컸구나라고 생각하며, 엄마는 자는 나를 봤을 것 같다. 그렇게 상상하니 나도 아기였다가 순식간에 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 친구처럼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친구라 치면,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준 친구는 없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 아빠의 제일 잘해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 남은 시간동안. 후회가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