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명륜2가 작업실은 창문 밖으로 큰 나무가 보인다. 무슨 나무일까 궁금했었는데, 며칠 따뜻한 날씨에 잎이 소록소록 돋아나더니 작은 부채꼴의 은행잎 형태를 갖추었다. 이제부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날 것 같다. 무성한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여름날, 또 그 잎들이 장맛비에 세차게 흔들리는 어떤 여름날을 상상해본다. 자라나는 조카들만큼 나무도 빠르게 자라지만, 한 번 자라고 나면 성장판이 멈추는 사람과는 달리 매년 시들고 사라지고 나이테 하나만 남기고 다시 시작하는 나무의 속성이 새삼 놀랍다.
어제는 오랜만에 울다 지쳤다. 몇 년 전 봉천동의 옥탑방에서 살 때, 햄톨언니에게 전화해서 펑펑 울던 그 때도 4월이었을까. 날이 너무 화창하면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들이 생각난다. 자고 일어나니 다행히 약속한 일들이 있어 몸을 움직였다. 휴지와 린스가 떨어졌다. 휴지와 린스를 사놓고 룸메가 기침 콜록거리는 것에 아는 체도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요즘 조금 다른 감각을 가진 것 같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있다. 그 다른 감각 때문에 끌려서 함께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그 다른 감각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고 움츠러들기도 한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차이에서 오는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을 때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말이 나온다. 차이에서 오는 긴장을 느끼는 건 잘하는데 창조적으로 끌어안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슬쩍 가방을 들고 나온다. 민주주의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깊이 와닿는 요즘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한동안 들뜬 마음으로 지내왔으니 필요한 시간들이 알아서 찾아왔다고 생각해 볼 참이다.
농사 짓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았다. 마음 따뜻한 사람과 햇볕 따뜻한 곳에 가서 두런 두런,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말들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