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외면일기'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5.09.01 제주여행 2일차, 제주 할망
  2. 2012.10.27 골뱅이 1
  3. 2012.10.22 어떤 공통점

알람을 맞춰놓지 않고 늦게까지 잤다. 청소 소리에 깼다. 이틀 숙박이라고 하더라도 아침 10시엔 나가야 한단다. 청소하는 스탭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씻고 도망가듯 나왔다. 야박한 규정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부지런을 떨 것 같다. 쫓겨나듯 숙소에서 나와 어젯밤 찾아둔 맛집에 갔다. 이스트이스트. 전화로 지민과 수다 떨면서 갔더니 금세 도착했다. 구름이 잔뜩 꼈던 어제와 달리 쨍한 하늘. 짧은 반바지 하나 챙기길 잘했다.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사람이 우글우글할 줄 알았는데 오픈 직전이라 그런 지 아무도 없다. 제주는 제주다. 서울의 맛집과는 손님 밀도가 다른 것이다. 버스도 없어 20분 정도 걸어 왔더니 땀이 송송. 동네 어귀에 있는 튼튼한 나무 아래 앉았다. 좋다. 조용하다. 시원하다. 바람이 분다. 그러고 있는데 일 나가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렸다. 할머니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아가씨여 아줌마여?

아가씬데... 나이는 아줌마 나이예요.


멋쩍게 웃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부모님은 계신지, 몇 째인지 묻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밭일 나갔다 들어오신 할머니 얼굴에도 땀이 송송하다. 얆은 피부를 뚫고 나온 실핏줄이 선명하다. 작은 코에 유난히 집중된 실핏줄이 신기해 자꾸 시선이 갔다. 할머니 대뜸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우리 아들이랑 한 번 만나볼텨? 우리 아들이 셋인데 막내가 결혼을 안했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우리 아들이 결혼을 안 해. 눈이 높아. 돈은 잘 벌어. 시에 집도 있고 차도 두 대여. 기사 한 명 월급 210만원씩 주면서 있고. 한 달에 천만원도 벌어. 삼다수 정수기 사업하는데 한 건에 50만원씩 벌어. 근데 결혼을 안 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짧은 반바지를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도 끈질기게 자기 아들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려와서 애만 낳고 키우면 된다고 돈은 잘 번다고.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는 아들이 참 말을 안듣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저한테. 아드님도 다 알아서 하실텐데...


어느 정도에서 수습은 해야할 것 같아서 몇 마디 꺼내봤지만, 전화번호를 주고 가라신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아들이 37살이라고 한마디 보태신다. 어색하게 웃고만 있다가 할머니가 일어나는 틈에 나도 얼른 일어났다. 또 전화번호 주고 가라고 해서 생각 있으면 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 나무 보고 찾아오라고 하신다. 알았다고 했다. 결혼 안 한 자식을 둔 부모는 다 이러는 것인가. 그 아들은 도대체 어떻게 처신했길래 할머니가 길에서 멍 때리고 있는 아무 여자를 잡는 것인가. 그래도 제주 할망과 처음 나눈 대화라 재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밥 먹고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갔다. 이것저것 밀린 잡일을 하였다. 혼자 여행 온 여자들이 나처럼 멍 때리고 있었다. 잠깐 밖에 나가 전화를 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는데 종아리가 내 손목보다 가는 할머니가 내 손가락보다 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내 옆에 앉으셨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묻는다. 또 혼자서 왔다고 서울서 왔다고 열심히 대답했다. 애인을 묻는다. 없다고 하니 내 눈을 지그시 보시면서 어디 묵냐고 하신다. 그 게스트하우스는 얼마냐고 하고 밥은 주는 지 묻는다. 거기는 싼 편이라고 저 위는 4-5만원 한다고 했다. 아침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손주는 이미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어디 사장이고 아들 둘을 낳고 산다고 했다. 그 뒤로도 많은 말을 했는데 사투리가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어나서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저기 보이는 하얀 집이 자기 집이라는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잘 놀다 가라고 인사를 하고 가셨다. 나같은 여행 뜨내기들을 많이 상대해 본, 쿨한 인사였다. 


나무 밑에 멍 때리고 있으면 동네 할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아들도 소개 받을 수 있는 곳이 제주다.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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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뱅이

2012. 10. 27. 02:27 from 또는 외면일기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 엄마의 전화.

 

"어딘데?"

"기차안"

"밥 먹었나?"

"응. 먹었지."

 

엄마가 보내준 홍삼과 비염에 대한 이야길르 한참 하다가 동생 여자 친구 이야기가 나왔다.

 

"oo이 여자친구 있대."

"어. 알고 있었다. 이번에 이야기하대."

"니한테 이야기하드나? 나는 이제 알았다."

"어떻게 알았는데?"

"아빠가 친구들이 화동이한테 쓴 쪽지 보고, 축하한다카면서 그래서 알았다."

"엄마 걔 아나? 나는 본 적 없는데."

"어. 대학부에 누구, 골뱅이라 카던데..."

"어?"

"골뱅인가? 뭐라 카드라?"

"엄마...소라다! 김소라."

"아, 맞다. 소라."

"사람 이름이 골뱅이가 말이 되나?"

"암튼 걔랑 사귄다카대."

 

Posted by cox4 :

어떤 공통점

2012. 10. 22. 16:42 from 또는 외면일기

비염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결국 비염전문한의원을 찾아갔다. 재작년 편집기간에 집중력이 너무 떨어져 큰 맘(너무 비싸다) 먹고 갔다가 효력을 본 곳이다. 비염은 생활의 문제라는 말에 또 한 번 공감하며 기나긴 치료가 시작되었다. 매주 한 번씩 침을 맞아야 한다기에 금요일 저녁 한의원의 침대에 누웠다.


의사선생님이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면서 침을 놓았다. 따끔한 자극과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음식 조절은 잘하고 있어요?"

"네. 뭐...노력은 하고 있어요."

"노력만 해서는 안 되죠. 하고 싶은 일 계속 하려면."

"네. 근데 밀가루 안 먹기가 어려워서. 라면 먹고 싶을 때도 있고요."

"아, 라면은 기름기를 빼서 먹으면 되요. 물을 많이 넣어서 스프는 반 만 넣고 (자세한 설명)..."

"그러면 그게 라면이 아니죠. 차라리 안 먹지."


의사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을 마치고 다음에 또 보자며 커튼을 닿고 옆 침대의 환자에게 갔다. 나는 수십 개의 침을 꽂고 눈을 가린 채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옆의 환자는 30대 중반의 여성이었고, 출산 후 비염이 심해진 것 같았다.


"약은 잘 먹고 있어요? 배변은 어때요?"

"잘은 먹는데 이거 계속 먹어야 돼요? 밥 세끼 먹고 하루 화장실 세 번 가면 하루가 다가요."

"그게 낫고 있는 거니까 해야죠. (몸을 치는)운동은요?"

"바빠서 못했어요."

"이걸 계속 해줘야 낫죠. 자기 몸을 챙겨줘야죠."

"챙기는데 바빴다니까요."

"아니 아무리 바빠도 자기 몸을 자기가 아껴줘야죠."

"제 몸인데 아끼죠. 당연히."

"근데 왜 안해요? 아이한테 사랑한다고 말만하는 것보다 한 번 안아주는 게 훨씬 더 좋죠?"

"그런가요?"

"거봐요. 못 느끼시잖아요."

"아니예요. 애한테 맨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데."

"아니 그러면서 안아주면 더 좋다니까요. 그걸 못 느끼시니까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지."

"맨날 안아줘요. 저도."


의사선생님은 투덜거림을 적절히 받아주고 환자도 노련하게 응석을 부리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저 이제 수영하면 안 돼요?"

"이제 좀 해봐도 될 것 같아요."

"지난 번에 수영했을 때는 너무 추워서 못했는데 이제 하고 싶어서." (참고로 비염환자들은 체온조절능력이 떨어진다)

"한 번 해보고 괜찮으면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네."

"암튼 약 잘 먹으시고 운동 빼먹지 마시고요."


의사선생님은 침을 다 놓고 커튼을 닿고 옆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갔다.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환자는 아이일 줄 알았는데 역시 30대 정도로 추정이 되는 여성이다. 환자는 선생님의 몇 가지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고 바로 묻는다.


"저 운동하고 싶은데 수영해도 괜찮아요?"

"수영은 좀 그럴텐데..."

"운동하려고 하셔서 수영하고 싶어서 끊으려고 하거든요."

"아직은 수영하기엔 추울 거예요."

"왜요? 격렬한 운동하면 좋다고 하셨잖아요."


세 번째 환자 마저 수영이야기를 했을 때 솔직히 놀랐다. 나도 몸이 좀 좋아지면 수영을 하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조깅 말고 또 어떤 운동이 좋은 지 다음에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다른 언니들이 다 질문을 한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들은 대화로 이 날 침을 맞은 세 명의 비염환자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셋 다 바쁜 사람들이다. 일을 하느라 몸을 돌볼 여유가 별로 없다. 의사 선생님의 진단과 치료 방법에 자꾸 왜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자기 건강에 좋지 않은 수영을 하고 싶어한다. 몸에 맞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걸까. 그게 비염을 부르는 생활습관인걸까. 그녀들의 대화패턴과 말투가 나와 너무 흡사했다. 어쩐지 비염환자들에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공통점이 더 있을 것 같다. 만나보고 싶다.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