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을 맞춰놓지 않고 늦게까지 잤다. 청소 소리에 깼다. 이틀 숙박이라고 하더라도 아침 10시엔 나가야 한단다. 청소하는 스탭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다닥 씻고 도망가듯 나왔다. 야박한 규정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부지런을 떨 것 같다. 쫓겨나듯 숙소에서 나와 어젯밤 찾아둔 맛집에 갔다. 이스트이스트. 전화로 지민과 수다 떨면서 갔더니 금세 도착했다. 구름이 잔뜩 꼈던 어제와 달리 쨍한 하늘. 짧은 반바지 하나 챙기길 잘했다.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사람이 우글우글할 줄 알았는데 오픈 직전이라 그런 지 아무도 없다. 제주는 제주다. 서울의 맛집과는 손님 밀도가 다른 것이다. 버스도 없어 20분 정도 걸어 왔더니 땀이 송송. 동네 어귀에 있는 튼튼한 나무 아래 앉았다. 좋다. 조용하다. 시원하다. 바람이 분다. 그러고 있는데 일 나가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트럭에서 내렸다. 할머니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아가씨여 아줌마여?
아가씬데... 나이는 아줌마 나이예요.
멋쩍게 웃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부모님은 계신지, 몇 째인지 묻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밭일 나갔다 들어오신 할머니 얼굴에도 땀이 송송하다. 얆은 피부를 뚫고 나온 실핏줄이 선명하다. 작은 코에 유난히 집중된 실핏줄이 신기해 자꾸 시선이 갔다. 할머니 대뜸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우리 아들이랑 한 번 만나볼텨? 우리 아들이 셋인데 막내가 결혼을 안했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우리 아들이 결혼을 안 해. 눈이 높아. 돈은 잘 벌어. 시에 집도 있고 차도 두 대여. 기사 한 명 월급 210만원씩 주면서 있고. 한 달에 천만원도 벌어. 삼다수 정수기 사업하는데 한 건에 50만원씩 벌어. 근데 결혼을 안 해. 여기서 살 생각 없어?
할머니는 내가 입고 있는 짧은 반바지를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도 끈질기게 자기 아들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려와서 애만 낳고 키우면 된다고 돈은 잘 번다고.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는 아들이 참 말을 안듣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저한테. 아드님도 다 알아서 하실텐데...
어느 정도에서 수습은 해야할 것 같아서 몇 마디 꺼내봤지만, 전화번호를 주고 가라신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아들이 37살이라고 한마디 보태신다. 어색하게 웃고만 있다가 할머니가 일어나는 틈에 나도 얼른 일어났다. 또 전화번호 주고 가라고 해서 생각 있으면 이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 나무 보고 찾아오라고 하신다. 알았다고 했다. 결혼 안 한 자식을 둔 부모는 다 이러는 것인가. 그 아들은 도대체 어떻게 처신했길래 할머니가 길에서 멍 때리고 있는 아무 여자를 잡는 것인가. 그래도 제주 할망과 처음 나눈 대화라 재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밥 먹고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갔다. 이것저것 밀린 잡일을 하였다. 혼자 여행 온 여자들이 나처럼 멍 때리고 있었다. 잠깐 밖에 나가 전화를 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는데 종아리가 내 손목보다 가는 할머니가 내 손가락보다 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내 옆에 앉으셨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묻는다. 또 혼자서 왔다고 서울서 왔다고 열심히 대답했다. 애인을 묻는다. 없다고 하니 내 눈을 지그시 보시면서 어디 묵냐고 하신다. 그 게스트하우스는 얼마냐고 하고 밥은 주는 지 묻는다. 거기는 싼 편이라고 저 위는 4-5만원 한다고 했다. 아침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손주는 이미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어디 사장이고 아들 둘을 낳고 산다고 했다. 그 뒤로도 많은 말을 했는데 사투리가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어나서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저기 보이는 하얀 집이 자기 집이라는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잘 놀다 가라고 인사를 하고 가셨다. 나같은 여행 뜨내기들을 많이 상대해 본, 쿨한 인사였다.
나무 밑에 멍 때리고 있으면 동네 할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아들도 소개 받을 수 있는 곳이 제주다. 넉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