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반복적으로 듣는 노래 제목이다. 길들이지 않은 새! 하늘을 나는 꿈을 마지막으로 꾼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몸도 연일 이어지는 촬영으로 가물가물하다. 내일 오전부터 또 다른 작업의 촬영이 있다. 요즘은 오전 일정이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그래도 의자를 찾아다니는 일, 그리고 의자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다. 순천 골목을 지나다가 저 빨간쇼파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 만나야 할 인연들을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집에 가는 길에 저 쇼파만큼 빨간 사과를 사서 가야겠다. 내일 아침에 싱싱한 사과를 흠뻑 깨물어 먹고 나면, 가물가물한 몸도 단단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작업 때문에 감성의 구멍이 너무 열렸는지, 온갖 음악과 풍경과 사람과 이야기에 반응을 한다. 오늘은 [선셋파크] 소설이다. 대학 다닐 때 폴 오스터 책 나오는 족족 하나씩 사서 읽고 좀 별로다 싶은 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 것이 나의 취향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하루키와 반대로 수필은 별로라서 소설만 읽었는데, 최근 작업 때문에 신간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책방에서 사서 첫 문단을 읽다가 덮었다. 단숨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그 때 시작해야겠다고. 첫 문단부터 무척 마음에 들었다. 버려진 사물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하고 있는 작업과도 연결이 되면서 강한 흥분. 폴 오스터의 소설은 단번에 나를 몰입하게 만든다.
오늘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여유가 좀 생겨서 빈둥대다가 [선셋파크]를 집었다. 훅 빠져들어서 읽다가 친구랑 만나기로 한 전철역도 지나치고 길에서도 읽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자꾸 책에 손이 간다. 아껴읽고 싶은 마음과 단번에 읽고 싶은 마음의 충돌.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읽고 싶은 마음을 좀 누르기 위해서 블로깅중이다. 이미 주인공들이 내 머리 속에 살고 있다.
요즘 또 나를 지배하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의 두 사람. 이 책 또한 읽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단숨에 읽었다. 그 후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하나씩 아껴읽는 재미를 누리고 있는데, 이제 초기작 두 권이 남았다. 침대 옆에 고이 놓여져있다. 어디 여행갈 때 들고가서 읽고 싶어서 사두기만 했다. 이 책이 이번 작업, 그리고 아마도 다음 작업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그제 밤에 작업실에서 나가면서 김창기 2집을 듣기 시작했다. 불금을 즐기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새벽내내 무한 반복 청취, 블로그를 발견해서 모든 글을 읽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듣지 못했다. 뭔가 겁이 났다. 오늘 다시 플레이를 눌렀다. '나를 둘러싼 이 벽을 무너뜨리고'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지, 벽을 기대고 여유로운 척 팔짱을 끼며 자신을 속일 지...늘 그렇듯 선택의 순간이 이어진다. 그렇지만 기도하지는 못한다.
김창기 2집 [내 머리속의 가시] - 원해
작업실에 나왔다. 교회에 갔더니 이번 주 신앙실천이 꽃 이름을 외우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목사님께서 이름을 외우면 삶이 풍성해진다고 했다. 어제 의자를 만드는 10여명의 학생들 이름도 성도 모를 때는 덩어리로 보였는데, 인터뷰를 한 사람씩 하고 이름을 알고 나니 하나 하나의 온전한 세계였다. 이름을 외우거나 단어를 정확하게 외우는 것을 가볍게 여겼었는데, 이름을 외워보고 싶다.
작업을 하면서 잠이 확 줄었는지, 정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을 덜 자도 괜찮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 잠이 줄었다.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뜨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다. 잠에서 깨면 깜깜한 방안에 누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정도 멍하니 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가거나 머리가 복잡해지면 일어난다. 빨리 씻고 나가면서 음악을 듣고 싶은 생각뿐이다. 음악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엔 눈을 떠서 30분 정도 멍 때렸다. 어제 12시간 빡센 촬영을 해서인지 몸이 무겁고 등에 통증이 있었다. 욕심을 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가질 수 있을 지 없을 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다.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원한다고 느껴지면 쉽게 포기를 해왔다. 그것이 단짝 친구인 경우도 그랬고, 일인 경우도 그랬고, 마음에 드는 이가 생겼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곰곰히 되짚어 보니, 언니와 동생 삼형제 중 둘째로 자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주어진 것은 한정되어있고 나눠쓸 수밖에 없었다. 언니와 동생 모두의 입장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셋 중 가장 욕심이 많고 자기 표현이 강한 사람이 나였기에 나만 내가 갖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면 순한 언니와 동생은 쉽게 내어줬고, 내게 주고 남은 다른 것으로 또 다른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에 언니와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욕심내어서 갖고 싶은 기회를 가져도 본래 자기 것이 아니면 기회가 되지 않는다는 걸 눈물 흘리며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었다. 재수한 언니와 동시에 수능을 봤을 때, 자기 성적보다 내 성적에 더 관심을 가지고 기뻐하던 언니를 보며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의 영역이 있단 걸 알았다. 그 영역으로 나도 넘어가고 싶었다. 이 후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욕심 나는 것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고, 경쟁을 해야 했다.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용기를 내어 평생 처음하는 낯선 말을 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쓸쓸함이 너무 크다. 그래서 누구라도 잡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잡히는 누구도 없었기에 혼자 삼키기로 마음 먹었다. 충분히 삼켜지면 그 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땐 담담히 이야기를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