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 나왔다. 교회에 갔더니 이번 주 신앙실천이 꽃 이름을 외우는 것이라고 적혀있다. 목사님께서 이름을 외우면 삶이 풍성해진다고 했다. 어제 의자를 만드는 10여명의 학생들 이름도 성도 모를 때는 덩어리로 보였는데, 인터뷰를 한 사람씩 하고 이름을 알고 나니 하나 하나의 온전한 세계였다. 이름을 외우거나 단어를 정확하게 외우는 것을 가볍게 여겼었는데, 이름을 외워보고 싶다.
작업을 하면서 잠이 확 줄었는지, 정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을 덜 자도 괜찮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 잠이 줄었다.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뜨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다. 잠에서 깨면 깜깜한 방안에 누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정도 멍하니 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가거나 머리가 복잡해지면 일어난다. 빨리 씻고 나가면서 음악을 듣고 싶은 생각뿐이다. 음악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엔 눈을 떠서 30분 정도 멍 때렸다. 어제 12시간 빡센 촬영을 해서인지 몸이 무겁고 등에 통증이 있었다. 욕심을 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가질 수 있을 지 없을 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다.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원한다고 느껴지면 쉽게 포기를 해왔다. 그것이 단짝 친구인 경우도 그랬고, 일인 경우도 그랬고, 마음에 드는 이가 생겼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곰곰히 되짚어 보니, 언니와 동생 삼형제 중 둘째로 자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주어진 것은 한정되어있고 나눠쓸 수밖에 없었다. 언니와 동생 모두의 입장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셋 중 가장 욕심이 많고 자기 표현이 강한 사람이 나였기에 나만 내가 갖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면 순한 언니와 동생은 쉽게 내어줬고, 내게 주고 남은 다른 것으로 또 다른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정도에 언니와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욕심내어서 갖고 싶은 기회를 가져도 본래 자기 것이 아니면 기회가 되지 않는다는 걸 눈물 흘리며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었다. 재수한 언니와 동시에 수능을 봤을 때, 자기 성적보다 내 성적에 더 관심을 가지고 기뻐하던 언니를 보며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의 영역이 있단 걸 알았다. 그 영역으로 나도 넘어가고 싶었다. 이 후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욕심 나는 것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고, 경쟁을 해야 했다.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용기를 내어 평생 처음하는 낯선 말을 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쓸쓸함이 너무 크다. 그래서 누구라도 잡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잡히는 누구도 없었기에 혼자 삼키기로 마음 먹었다. 충분히 삼켜지면 그 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땐 담담히 이야기를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