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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는 가을

2013. 8. 31. 14:49 from 그래서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 '아 가을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불 속에서 좀 더 꼼지락 거리면서 꿈을 이어간다. 더 이상 전개할 꿈 속 이야기가 없으면 눈을 뜨고 한참 이런 꿈을 꾸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한다.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햇살이 살짝 들어오는데, 역시 가을이구나 싶다. 계절은 이렇게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시간은 성실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데, 나는 제대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가을로 가는 시기는 어렵다.


가을을 무서워하는 건 단순히 가을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환절기가 되면서 코가 맹맹해지는 걸 수십년 겪다보니, 가을이랑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깊숙히 새겨진 것 같다. 코가 맹맹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머리가 멍해지면 의욕이 사라진다. 잠을 자는 것만이 유일한 비상구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비상구에 숨어들어 며칠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은데, 가을이 정말 찾아오기 전에 마무리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며칠동안 가까운 친구들에게서 안타까운 소식을 몇 개 들었다. 기운 내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일들이 아니라 이상한 방식의 위로들을 하게 되었다.


날이 선선해지면 바로 핸드크림을 찾게 된다. 한 밤 중에 목이 막혀 깨서 급하게 물을 마시는 일이 잦아진다. 그럴 때 예전에 한 연예인이 썼던 시가 생각이 난다. 바삭한 걸음을 인정하고 싶다.


하얀 쌀밥에 가재미얹어 한술뜨고 보니 낮부터 잠이 온다.

이 잠을 몇번 더 자야지만 나는 노인이 되는걸까.

나는 잠이들며 생각한다.

 
다시 눈을뜨면 다 키워논 새끼들이랑 손주들도 있었으면 좋겠다.

수고스러운 젊음일랑 끝이나고 정갈하게 늙는일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날의 계절은 겨울이였으면 좋겠다.

하얀눈이 펑펑 내려 온통을 가리우면 나는 그리움도 없는 노인의 걸음으로 새벽 미사에 갈 것이다.

 

젊은날 뛰어다니던 그 성당 문턱을 지나 여느날과 같은 용서를 빌고

늙은 아침을 향해 걸어 나올 때 그날의 계절은 마침 여름이였으면 좋겠다.

 

청명한 푸르름에 서러운 세월을 숨기우고 나는 그리움도 없는 노인의 걸음으로 바삭한 발걸음을 뗄 것이다.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