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일 강행군이다. 작업 마무리하면서 생소한 HD출력과 배급 관련한 업무들이 있고, 3월부터 시작할 공부방 미디어교육 준비, 작업한다고 그동안 미뤄뒀던 모임들을 꾸리느라 그렇다. 이렇게 적고 보니 별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동안 듬성듬성 혼자서 작업만 하다가 뭔가 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문서를 주고 받으며 일을 하다보니 뭔가 빡빡한 느낌이 드나보다. 하나 둘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to do 리스트를 지워가는 느낌이랄까. 하루를 자유롭게 살자는 말을 되뇌이지 않으면 아마 to do 리스트를 지우는 재미도 잊고 질질 끌려갈 것이다. 그건 한 순간이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이 즐겁다. 오랜만에 듣는 친구들의 소식도 반갑다.
'돈 되는 작업을 해라' 는 말을 최근 자주 듣는다. 상대에 따라 그 말을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엄마처럼 정말 돈 되는 작업을 해서 여유있게 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상업영화작업이 익숙하신 신감독님처럼 나의 좁은 폭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나에게 그런 의미들로 읽힐 때는 사실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돈이 필요하고 폭이 좁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독립다큐 혹은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이상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독립'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일까. 굳이 독립이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일까. 돈 되는 작업을 하는 것과 내가 한 작업으로 돈을 버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나도 당연히 내가 한 작업으로 돈을 벌고 싶다. 가능한 많이. 근데 이 일이 그럴 수 없는 조건이란 걸 알고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않게다는 것은 아니다...흔들리는 것은 내가 나를 어떤 바운더리 안에 위치시켜놓은 탓이다.
주저주저하다가 말 못할 때가 많았다. 내가 당사자가 아닌 격렬한 논쟁의 현장에 낀 적도 별로 없다. 예민한 신경전이 오가는 게시판에 글을 남긴 적도 없다. '나'의 일엔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만, '남'의 일엔, 그게 설령 나와 거의 같은 처지의 '남'의 일일지라도, 빠르게 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넒은 것이라 믿었다. 스스로. 모든 사건과 논쟁과 첨예한 감정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모든 이들의 판단을 곱씹고 나서야 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신중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타이밍. 그런 일은 소수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보다 넓은 범위의 관계 사이에서 많이 있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고 주저하고 있을 때, 폭력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는 이가 대세가 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아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절레절레. 나는 섣부를지도 모른다고,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서가 아니라 괜히 말을 꺼냈다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질까봐, 다른 이들의 판단의 잣대 앞에 서는 것이 싫고 두려워서 모른 척 한 경우가 더 많았다. 안전하고 비겁한 타이밍. 확실히 모른 척하면 생활이 편하다. 그런데 자꾸 캥긴다.
올해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늦지 않은 타이밍에 용기를 내어 말하는 방법, 제안하는 방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근데 벌써 두렵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 책임을 짐으로써 자유롭다. 책임을 짐으로써 자유롭다.
오늘 하루 성실하게 살았다. 자유롭게 잠들어야겠다. (남의 집이긴 하지만)
'돈 되는 작업을 해라' 는 말을 최근 자주 듣는다. 상대에 따라 그 말을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엄마처럼 정말 돈 되는 작업을 해서 여유있게 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상업영화작업이 익숙하신 신감독님처럼 나의 좁은 폭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나에게 그런 의미들로 읽힐 때는 사실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돈이 필요하고 폭이 좁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독립다큐 혹은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면 이상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독립'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일까. 굳이 독립이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폭이 너무 좁은 것일까. 돈 되는 작업을 하는 것과 내가 한 작업으로 돈을 버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나도 당연히 내가 한 작업으로 돈을 벌고 싶다. 가능한 많이. 근데 이 일이 그럴 수 없는 조건이란 걸 알고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않게다는 것은 아니다...흔들리는 것은 내가 나를 어떤 바운더리 안에 위치시켜놓은 탓이다.
주저주저하다가 말 못할 때가 많았다. 내가 당사자가 아닌 격렬한 논쟁의 현장에 낀 적도 별로 없다. 예민한 신경전이 오가는 게시판에 글을 남긴 적도 없다. '나'의 일엔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만, '남'의 일엔, 그게 설령 나와 거의 같은 처지의 '남'의 일일지라도, 빠르게 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넒은 것이라 믿었다. 스스로. 모든 사건과 논쟁과 첨예한 감정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모든 이들의 판단을 곱씹고 나서야 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신중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타이밍. 그런 일은 소수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보다 넓은 범위의 관계 사이에서 많이 있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고 주저하고 있을 때, 폭력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는 이가 대세가 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아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절레절레. 나는 섣부를지도 모른다고,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서가 아니라 괜히 말을 꺼냈다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질까봐, 다른 이들의 판단의 잣대 앞에 서는 것이 싫고 두려워서 모른 척 한 경우가 더 많았다. 안전하고 비겁한 타이밍. 확실히 모른 척하면 생활이 편하다. 그런데 자꾸 캥긴다.
올해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늦지 않은 타이밍에 용기를 내어 말하는 방법, 제안하는 방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근데 벌써 두렵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 책임을 짐으로써 자유롭다. 책임을 짐으로써 자유롭다.
오늘 하루 성실하게 살았다. 자유롭게 잠들어야겠다. (남의 집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