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난 사람 때문에 초조하다. 그 사람은 무척 따뜻한 사람이다.지금까지 일 때문에 몇 번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따뜻함 때문에 헤어질 땐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긴장이 풀렸다.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녀와 나의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잘 못 살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였다. 그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 긴장을 한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긴장한다. 아득한 차이. 날카로움이란 그저 무력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한 날섬, 포기하지 않으려는 어떤 기준, 상대를 위한답시고 내뱉는 평가. 그런 것들이 실은 다 나를 위한 긴장에서 나온 것일뿐, 뭔가 다른 것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걸 인정할 수밖게 없게 되는 밤이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한 사람은 생각보다 크다. 맑고 따뜻한 존재는 예측할 수 없는 물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렵다. 고맙다. 부끄럽다. 또 고맙다.
추석 연휴라 오랜만에 대구집에 다녀왔다.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작업을 했고, 2년 여의 작업을 일단 끝났다. 이번 연휴는 며칠, 아니 실은 2년 여의 긴장이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다. 좁아졌던 어깨가 더 좁아진 아빠. 엄마는 이제 할머니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뱃살 좀 빼야겠다며 놀리자, 배가 나와서 벨트하지 않아도 엄청 좋다며 웃는 엄마. 엄마 옷을 사고 따라 간 언니 옷도 사고. 같이 밥도 먹고. 쇼파에 드러누우워 테레비도 보고. 잠이 밀려왔다. 그냥 잠이 아니라 아주 깊은 곳에서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잠이다. 자도 괜찮은 상황을 알고 오는 잠이다. 대구에 오면 종종 만나는 종류의 잠이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잤다. 몸이 바닥에 흡수될 것처럼 깊이 내려갔다. 그렇게 낮잠과 밤잠을 몇차례.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깊은 편안함을 주는 친구들이다. 1-2년에 한 번씩 만나서 사는 이야기 가볍게 나누었다. 이번엔 오랜 공백 탓인지, 제각기 사는 것이 힘들었는지 밥 먹다가 목소리가 커졌다. 그럴듯한 이야기, 편하게 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들만 나누다가 어느 순간 그 경계가 뚫어져버린 것이다. 자격지심과 허세란 단어가 오갔던가. 눈물도 터졌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좋다고 고맙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혹은 너네들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는 친구들. 한 차례 엉킨 감정이 풀리고나자 눈물 폭발하지 않은 나에게도 구질구질한 이야기 해보라며 농담을 하는 친구들. 근데 나는 격한 감정은 많이 정리가 되었고. 친구는 화장실 가려고 자리를 비우면서 고등학교 1학년 쉬는 시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한다. 자기 없을 때 자기 욕하지 말라고. 어쩜 하나도 안 변하냐며 웃음. 싸우고 삐치고 다시 헤헤 거리는 것을 반복했던 고등학교 때처럼 서러운 눈물을 쏟고도 다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
다시 집. 혼자 사는 집. 이사 오면서 가구는 책상과 침대만 샀다. 잠이 하루의 컨디션을 좌우하기에 침대는 가급적 심플하고 편안한 걸로 사려고 했다. 책상은 햇볕 좋은 날, 혹은 잠이 오지 않는 새벽 글을 쓰기 좋은 것을 사려고 했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사이즈의 책상을 샀지만 앉아서 편안하게 글을 쓴 적은 없다. 하고 있던 작업 때문에 작업실의 책상에 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오늘에서야 여유있는 마음으로 앉아보았다. 집에 와서도 한차례 깊은 낮잠을 자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소식을 보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노래도 한참 듣다가. 책을 읽기 전 책상에 앉아보았다. 오랜만이다.
0818
어제부터 300개의 파일을 다시 변환하고 있다.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고 하며 넘어가려고 했는데, 밤새 뒤척였다. 긴장해서 힘주고 잤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턱이 얼얼하다. 서둘러 씼고 작업실 가서 파일들 무사히 변환이 되었는지 확인하다가, [의자가 되는 법]에 출연하셨던 형욱씨를 만나 맛있는 쌀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따뜻한 카페라떼 한 잔, 인터뷰 하면서 따뜻한 차 한 잔, 버스 타고 이동해서 영화 상영회 전에 숨 돌릴 곳이 필요해서 치즈케잌과 아메리카노 한 잔, 부산에서 온 친구와 용인에서 온 룸메 언니와 매운 무교동 낙지 먹고 비오는 거리 카페에서 블루베리는 보이지 않는 블루베리 스무디 한 잔, 그리고 영화 대담회 마치고 뒤풀이 하면서 맥주 두 잔. 오늘 많이도 마셨다. 많이도 만났다.
0819
파일을 변환하고 확인하고 옮기고 다시 링크 시키고 하는 작업, 아주 정직한 노동이다. 꼼수가 없네.
0820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장 먼저 온 연락은 남은 돈 다 빼간다는 출금 알람. 목공 배우러 가는 날이라 몇 시간 못 자고 졸린 눈 비비며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층층마다 섰다. 같이 타고 있던 아줌마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두 개 다 눌러 있었나 보다하며, 조금 늦게 태어났다 생각하면 된다고 하셨다. 한 시간쯤 늦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일단 한 시간만 자야겠다.
0821
띵똥. 입금 알람이다. 돈 들어올 곳이 없는데. 친구 이름이다. 뭔가 부탁하려나 기다리는데 작업비에 보태쓰라고 친구들이 입금한 거란다. 고마워. 그 짧은 인삿말 전하기도 전에 카드회사와 통신사에서 일부를 빼 갔다. 그러면 좋지뭐 한다. 처음엔 도움 받는 것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잠시 생각하다 고맙게 알차게 잘 쓰기로 했다. 그래야 나중에 갚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모두 마음이 어려운 시절이지만, 이런 일들로 버티게 되나보다.
시선을 밖으로 두면 서러운 일만 눈에 보인다는 핑계로 내 안에 갇혀있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모르겠다. '문득 잘못살고 있다는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