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외면일기'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2.05.27 갑자기 국진이빵
  2. 2011.11.18 특산물 판매하다말고 아저씨
  3. 2010.11.08 솔직한 손녀 2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높아지던 어느 날, 버스에 여대생들이 대여섯명 탔다.


1: ㅇㅇ는 시디플레이어를 모르더라. mp3는 아는데.

2: 진짜요?

1: 응. 시디를 넣어서 듣는 거라니까 막 웃더라고.

3: 우린 진짜 많이 들었는데.

1: 파일로 안 듣고 그걸 들고 다니냐고.

3: 우리 전에는 워크맨 들고 다녔는데.

2: 워크맨이 뭐예요?

3: (웃음) 걸어다니면서 테이프 넣어서 듣는 거.  너네도 모르는구나.

2: 네.

4: 우린 초1때 삐삐나왔어요.

5: 전 삐삐 본 적 없어요. 국진이 빵은 말로만.

4: 남자의 자격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보지 않아도 목소리마다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Posted by cox4 :
참 오랜만에 외면일기를 쓴다. 외면일기를 얼마나 쓰는 지가 내 정신적 건강함을 진단하는 척도인데, 일부러 써보려고 해도 써지지 않던 지난 몇 달간 혹은 일년. 멍 때리는 여행을 다녀오고나서야 겨우 하나의 외면일기거리가 생겼다. 블로그에 글도 오랜만에 쓰다보니 횡설수설하는 느낌이다. 외면일기를 안 쓰는 데는 게으름도 한 몫하겠지만, 그것도 정신상태의 일종인지라.

해남에 여행을 간 김에 기념이 될만한 뭔가를 사고 싶었다. 둘째날 밤 9시쯤 숙소 근처에 있는 해남특산물 판매장에 갔다. 특산물인 해산물 그 중에서도 건어물을 많이 팔았다. 오징어는 버스에서 냄새가 날 것 같고, 미역은 너무 크고 또 흔하고, 멸치는 많이 안 먹을 것 같고 해서 망설이다가 다시마를 골랐다. 가방에 여유가 없어서 작은 9천원짜리를 사서 계산을 하고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혹시 저거 보셨습니까?"

아저씨는 매장의 벽에 걸린 화이트 보드를 가리켰다. 거기엔 '목숨이 경각을 다툰다하여 어찌 가던 길을 멈출 수 있으리요. 공자'라는 아저씨의 메모가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아저씨는 말을 이어간다.

"처음보는 손님한테 이런 말해서 어찌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술을 먹은 김에 좀 이야기할게요. 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이큐가 157이에요. 영어단어 수십개를 한 번에 외워요. 저도 깜짝 놀래요. 동네 사람들한테 말하면 흉보지만 손님이니까. 그런데 제가 걔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서울에서 온 문제집은 시시하다고 풀지도 않아요. 동생 줘버리고. 이 시골에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제가 매일 밤 울어요."

술 취한 김에 아들 자랑 하나보다 싶어 문고리를 놓지 않고 적당히 리액션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술 주정이라고만 보기엔 너무나 진중한 아저씨의 말투.

"사모님은 결혼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노래 가사를 그냥 가사로만 보지는 않아요. 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 있잖습니까? 그 가사처럼 여자는 남자가 잘 떠다니리 수 있도록 잔잔히 잘 받쳐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우리 집사람은 그렇지가 못해요. 잘한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나갈 때마다 돈 좀 벌어오라고 하고. 그 사람이 벌써 12번 집을 나갔어요. 이번에 13번째 나갔을 때는 제가 안 받아줬습니다.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돌아오겠다고 하는데, 그냥 오지말라고 했습니다. 나갈 때 그냥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작은 동네에 소문 다 나도록 택시 부르고 짐 다 나르고. 어휴 말도 못합니다. 애들도 그냥 던져버리고. 장인 어른이 결혼한다고 할 때 성질이 못쓰니까 알아서 살라고 할 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왜 집을 나갔는지 물었다.

"그건 제가 잠꼬대가 심한가봐요. 평소에 못했던 말들을 잠꼬대 하면서 하나봐요. 그러면 다음날 아침에 그것때문에 싸우고. 그래도 전 절대 폭력은 쓰지 않습니다. 잠꼬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그것 때문에 싸우고. 우리만 살면 모릅니다.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사람이. 제가 지금까지 30억을 벌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15억 정도 낭비한 거 빼면 제가 목표한 50억 다 벌었습니다. 요즘에 저 자신한테 물어봅니다. 제가 한 결정이 잘한 것인지. "

그 후로 두 세명의 손님을 받으면서도 아저씨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아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결혼해서 같이 살기에는 좀 힘든 타입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본인 중심이었다. 나가고 싶어서 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나의 표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마침 손님들이 와서 계산해달라고 하는 틈을 타서 특산물 매장을 빠져나왔다.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찌나 숨통이 트이던지.
Posted by cox4 :

솔직한 손녀

2010. 11. 8. 19:17 from 또는 외면일기
오늘 종로3가에서 할아버지들 사이를 빠져나오는데, 또 한 번 떠올랐다. 몇 달 전, 햇볕이 따뜻했던  버스에서 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

엄마와 동생,할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탄 8-9살 정도의 여자아이. 엄마는 동생과 앉고 그 아이는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엄마 옆에 앉고 싶은 아이가 자꾸 엄마에게 왔다갔다 했다. 엄마가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자 아이는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가 참 귀여운지 가만히 쳐다본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대하는 걸 좀 어려워하는 걸로 봐서 자주 만나거나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애정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생 모르고 살아오신 남자사람인 것 같았다. 손녀가 너무 예쁜데, 쓰다듬지도 못하고 쉽게 말 붙이지도 못하고, 희미한 미소만 감추지 못하는 모습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또랑또랑하고 큰 목소리(버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만한 크기)로 물었다.

"할아버지한테서 냄새나요. 무슨 냄새예요?"

킁킁 거리면서 할아버지 곁에 다가간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말도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러나 계속 버스 안에 울려퍼지는 아이의 목소리.

"무슨 냄새예요?"
"냄새는 무슨..."
"어? 냄새 나는데? 무슨 냄새예요?"
"아니..."
"할아버지 무슨 냄새예요?"

손녀는 반복되는 물음에 쩔쩔매는 할아버지. 옆에 있던 내가 보기엔 그건 다른 특별한 냄새가 아니라,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났던 노인들 특유의 어떤 냄새였다. 계속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며 냄새를 맡는 걸로 보아 손녀는 할아버지의 냄새가 싫어서 묻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 맡아본 적이 없는 종류의 냄새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 같았다. 허나 그런 질문일수록 대답하기 어려운 법. 아이의 질문을 오랜만에 받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늙어서 나는 냄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노인에게서 나는 냄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