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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8 솔직한 손녀 2
  2. 2010.10.25 인생은 꿈, 꿈은 인생 5
  3. 2010.10.19 몰리고 있다 5

솔직한 손녀

2010. 11. 8. 19:17 from 또는 외면일기
오늘 종로3가에서 할아버지들 사이를 빠져나오는데, 또 한 번 떠올랐다. 몇 달 전, 햇볕이 따뜻했던  버스에서 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

엄마와 동생,할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탄 8-9살 정도의 여자아이. 엄마는 동생과 앉고 그 아이는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엄마 옆에 앉고 싶은 아이가 자꾸 엄마에게 왔다갔다 했다. 엄마가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자 아이는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가 참 귀여운지 가만히 쳐다본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대하는 걸 좀 어려워하는 걸로 봐서 자주 만나거나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애정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생 모르고 살아오신 남자사람인 것 같았다. 손녀가 너무 예쁜데, 쓰다듬지도 못하고 쉽게 말 붙이지도 못하고, 희미한 미소만 감추지 못하는 모습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또랑또랑하고 큰 목소리(버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만한 크기)로 물었다.

"할아버지한테서 냄새나요. 무슨 냄새예요?"

킁킁 거리면서 할아버지 곁에 다가간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말도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러나 계속 버스 안에 울려퍼지는 아이의 목소리.

"무슨 냄새예요?"
"냄새는 무슨..."
"어? 냄새 나는데? 무슨 냄새예요?"
"아니..."
"할아버지 무슨 냄새예요?"

손녀는 반복되는 물음에 쩔쩔매는 할아버지. 옆에 있던 내가 보기엔 그건 다른 특별한 냄새가 아니라,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났던 노인들 특유의 어떤 냄새였다. 계속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며 냄새를 맡는 걸로 보아 손녀는 할아버지의 냄새가 싫어서 묻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 맡아본 적이 없는 종류의 냄새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 같았다. 허나 그런 질문일수록 대답하기 어려운 법. 아이의 질문을 오랜만에 받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늙어서 나는 냄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노인에게서 나는 냄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Posted by cox4 :
버스 맨 뒷자리,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일어나서 버스노선을 본다. 그 때 낭랑하고 똑부러지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오른쪽 귀로 들어와 박혔다.

"엄마, 목말라, 물줘."

너무도 똑부러지는 목소리. 다섯 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찰랑찰랑한 단발머리에 짧은 앞머리. 생긴 것도 오밀조밀. 머리띠를 벗었다가 다시 끼는 모습이 참 야무지다. 아이들은 언제부터 목마른 느낌을 인식하고, 목마르다고 표현하게 되는 걸까. 생각에 빠져있는데, 아이가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 그 유창한 발음에 또 한번 놀랐다. 그 엄마가 영어로 몇 마디 한다. 그녀 역시 유창하다. 부럽다. 내가 아이를 기르게 된다면, 그래도 영어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하고 싶다. 학원에 억지로 보내지 않고 그렇게 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결국 유학인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들려오는 아이의 노래 마지막 구절.

"(영어노래;).....Life is dream."
그리고 덧붙이는 조숙한 목소리를 가진 아이의 해석.
" 꿈은 인생 같은거야."
"하하. 인생이 꿈같은 거야."
엄마가 수정해준다.
"인생은 꿈같은 거야."

나와 같은 곳에 내리는지 아이와 엄마가 버스 문 앞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내리기 전에 카드를 단말기에 대자, 그 때 타는 사람들의 요금을 엄마가 내주는 줄 알았는지 묻는다.

"왜 엄마가 내?"
"어?"
"왜 엄마가 내?"
"내릴 때 찍는거야."

엄마가 여기가 창덕궁이 맞냐고 물어보러 간 사이에 노약자석에 앉아있던 아이가 안전벨트를 채웠다. 금방 창덕궁에 도착했고 나는 내리려는데, 아이가 혼자 버둥버둥 거리며 벨트를 풀려고 했다. 팔이 짧아 빨간색 버튼을 힘껏 누르지 못하고 있어서 도와주려다가 엄마가 있으니까 하면서 기다리는 사이, 엄마는 운전사 아저씨에게 물어보고 와서 바로 뒷문으로 내리려고 한다. 엄마가 내리려는 순간, 그 때까지 혼자 풀어보겠다고 끙끙대던 아이가 그제야 다급하게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 이것 좀 풀어줘."
"으이구. 아저씨 잠깐만요."

열린 문으로 내리려다 말고 엄마는 뒤돌아보았다. 다섯살 짜리 아이가 안전벨트를 풀지 못하는 위험에 처했는데도 어떻게 엄마를 바로 찾지 않고 그렇게 혼자 알아서 해보려고 할 수 있을까. 자립심이 참 강하다며 감탄을 하며 걸어가는데 엄마가 아이를 혼내면서 뛰어간다.

"그래서 내가 너를 안 데리고 다닌다니까."

내겐 놀랄 정도로 똑부러지고 자립심이 강해보이는 그 아이도, 엄마에겐 말썽 피우는 말괄량이인가보다. 인생은 꿈, 꿈은 인생.

Posted by cox4 :

몰리고 있다

2010. 10. 19. 01:49 from 그래서 오늘
"한계가 왔나?"
공부를 해볼 생각이라는 내 말에 언니가 한 말이다. 더 배워야 만들 수 있겠냐고.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을 벌고 싶냐거나 학력을 필요하냐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냐고 짐작했었는데, 그럼 나도 그 말을 어느 정도 긍정하곤 했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요즘 내 일상도 모르는 언니가 단번에 내 상태를 읽었다. 그 한계가 무엇인지, 공부를 한다고 나아질 수 있는지, 다른 방법이 필요한 건 아닌지, 다큐작업 때문인건지, 물을 수도 없을 만큼 조급한 느낌이다. 그 느낌 덕분에 더욱 무거운 일상이다. 그 조급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우선 돈이 없고, 시간이 없다. 아니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베프 두 사람과 수다를 한참 떨고 왔다. 그야말로 생계를 고민하는 이야기. 분위기가 점점 구려지는 것 같아서 뭔가 상큼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 3년 뒤엔 뭐하고 싶냐는 질문이 적당할 것 같아 기회를 노렸지만, 이번 달 카드값이 걱정이라는 친구의 말에, 나도 다다음달 이사할 보증금 마련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 걱정을 이어이어이어하다보면 몇 년의 시간이 또 흐르겠구나 싶다. 조금만 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이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10년이 아니라 3-4년 정도만이라도. 아니 당장 내년이라도 계획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뭐 없나. 뭐 없나. 이 한 마디가 계속 나왔다. 뭐가 없다는 것도 알고, 내년의 생계비를 준비해놓지 않더라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란 것도 안다. 그리고 돈을 잘 버는 것보다 내가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한다는 것도 안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선 지금의 고민들을 계속 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돈이 없어 가족끼리 날카롭게 부딪혀야했던 그 순간들이 아직 내 몸에 남아있어서 두려움이 몰려온다. 지금이 위기라는 적신호가 저기 멀리서 오고 있다. 지금이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라는 메시지가 내 마음을 맴돌고 있다. 우리집은 카드값 20개를 돌려막아봤다, 부모님이 빚 남겨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친구들의 말.

집으로 오는 길에 아는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고졸로 일하면서 무시당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술 먹고 나에게 만날 징징대던 그 녀석이 매수과로 옮겼다며 자랑을 했다. 고졸이 매수과로 가는 게 자기 회사에서 처음이라며, 회사 다니는 친구들에게 매수과가 어떤 곳인지 물어보라고 한다. 그 자랑질에 한 것도 없이 마음이 흐뭇해졌다. 나한테는 늘 징징대더니 나름 인정받고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보험을 하다가 소방공무원 준비를 하던 다른 친구는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일당 12만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전 촬영 때문에 조선소에 갔다가 그 열악한 작업환경을 보고 놀랐었는데, 그런 곳에서 일한다고 하니 마음이 짠. 그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고등학교때부터 세차장알바부터 안해본 알바 없이 쉬지 않고 일하던 동생들. 모두 집에 얼마씩 돈을 보내야 한다. 나에게 자주 연락하며 보험을 들어줬으면 하는 눈치였었는데, 나도 보험들 형편이 아니어서 못들어줬다. 그럴 때 내 직업이 참 아쉽다. 누구 하나 쉽게 돈 벌고 편히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오늘은 징징거림을 토해내지 않으면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내 몸 하나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고 싶은 작업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약간 불안하다. 그래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 내년을 어떻게 할지가. 이런 생각들을 적지 않으면 안되는 걸 보니, 나 정말 몰리고 있나보다. 우리 모두 몰리고 있구나 싶다. 몰리고 있을 때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일 아침,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몰리고 몰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촬영하러 가야 한다. 그럴려면 일찍 자야지.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