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2012. 10. 7. 16:17 from 그래서 오늘

연휴를 기점으로 기약없이 자는 날이 계속 되고 있다. 기약이 없다는 것은 알람소리에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알람을 듣기라도 했었는데 연휴동안 긴장을 다 빼내버린 몸은 나의 말을 듣기로 거부한 것 같다. 물론 오전 일정이 있을 때는 가까스로 일어난다.


지금 촬영과 제작으로 참여하고 있는 작업이 있다. 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시작하려고 생각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작년 여름 정도부터 마음을 먹었는데 여태 못 들어가고 있다. 하고 있는 작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획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머뭇거리는 지점이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한 작업을 시작하면 배급까지 적어도 3년이란 시간은 걸리는 것 같다. 그 시간을 쏟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6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고, 확신이 들었을 때는 본격적으로 작업하긴엔 시간이 없었다. 아니 왜 자꾸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두려움이 있었다. 작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 작업으로 일상이 매몰될까봐...여기까지 적고 보니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고 삶의 원동력이지만, 작업으로 인해 정신없이 살고 싶지는 않다. 헌데 아직은 일상을 챙기면서 작업할 수 있는 내공이 쌓인 것 같지 않고, 일상의 즐거움을 포기할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진 않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준비가 되지 않아 자신이 없는 것일수도 있다.


과거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역사를 설명하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런 문장을 보고 나는 지혜롭진 못하구나 하고 실망을 했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드라마도 역사물에는 관심이 없다. 뭔가 과거의 이야기라고 하면 그냥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의 반복, 과거가 곧 다가올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무척 동의하지만 뒤를 돌아보고 방향을 수정하는 감각은 전혀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저 순간적인 감정에만 이끌리는 동물인 것이다. 왜 그럴까? 모두가 해품달에 열광할 때 한 편도 보지 않는 나에게 자주 질문을 했었다. 목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기어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끌리는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까운 미래만 살아내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위해서라 해도 순간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5분만 더를 외치며 이불을 끌어안고 평생 지각을 일삼았고, 먹는 양을 줄이는 다이어트는 늘 실패했었다. 지각이 줄어든 것은 지각하지 않는 만족감이 잠이 주는 달콤함 보다 컸기 때문이고, 살이 저절로 빠진 것은 먹는 것으로 인한 포만감보다는 먹는 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프다.


역사를 생각하다보니 두 번째 문단을 쓸 때 알듯 모를 듯 했던 나의 고민 지점이 명확해졌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어쩔 수 없이 완성을 위해 달리는 것이다. 과정의 즐거움도 무척이나 크지만, 그것은 끝까지 달려야 비로소 제대로 획득되는 즐거움이기도 한 것이다. 그 과정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즐거울수만은 없었던 지난 작업의 과정들을 잊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정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동료들과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것에도 집중하고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기도 했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과정의 괴로움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능한 그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애써온 시간들이 지난 1년이었고, 이제 남은 것은 필연적인 괴로움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괴로움이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일을 하는 모두가 감수하는 정도의 괴로움인데 나는 어째서 그 괴로움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멍청하고도 오만하다.


거친 생각들을 좀 더 섬세하게 다듬고 싶다. 그래도 조금은 더 마음 따뜻하게 작업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돈인데...돈으로 작업시간을 만들 수 없다면...(사람)




Posted by cox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