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잡힌 약속이 취소되어서 작업실에 있다. 보고 싶던 이를 못 보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빗소리 들으면서 작업실에 있는 기분도 므흣하다. 다행히 작업실 들어올 때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사왔다. 텀블러를 가져갔더니 무려 2500원. 커피의 맛을 생각하면 3000원도 싸다고 생각했는데 500원 할인이라 더 좋다. 작업실에 머물게 되어서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 일들 다 미뤄두고 놀려고 했던 나는 뭐지?
두어달 전부터 노인미디어교육을 하고 있다. 평소 컴퓨터와 영상에 관심이 많으신 어르신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교육이다. 어르신들은 몇 년동안 컴퓨터의 기술 배우는 것을 주로 하셨기 때문에 이번 수업도 동영상제작프로그램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교사들이 계속 하고 싶은 이야기, 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고 하는 게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초반 몇 주동안 반복하셨다. 어느 날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한 남자 어르신께서 손을 들고 말씀하셨다.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이런 걸 배우려고 온 게 아니라..." 하면서 지금하고 있는 창작, 표현의 과정들이 버겁다고 말씀하셨다. 해보지 않았던 활동들에 대한 두려움 반, 잘하고 싶은 마음 반 때문에 이런 교육을 할 때마다 어르신들이 반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라서, 결국 이 과정이 끝나면 무척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냥 흘려들으려고 했는데 말문을 연 '곰곰히 생각해봤는데'라는 말에 압도되어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느낌이 전해진다. 그것은 깊이 생각해본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여러 방향으로 열어놓고 진중하게 모색해보는 느낌,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객관적으로 살펴보려고 애쓰는 느낌. 필사적으로 생각해봤다는 사람에겐 설득할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곰곰히 생각해봤다는 사람은 '그럴수밖에' 하면서 인정하게 된다. 그런 류의 말에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