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이동

2011. 1. 2. 03:10 from 그래서 오늘
날짜상으로는 2011년 둘째날이지만, 아직 잠들지 않았으니 나에겐 첫 날이다. 오늘 하루 참 길었다. 몇 년만에 송구영신예배를 보았다. 예배 중에 돌아다니며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 혼자 뻘쭘히 서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송구영신예배에 가지 않았다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몇 십년동안 반복된 문제로 아빠와 싸웠단다.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다. 20분 넘게 엄마는 아빠가 잘못했다는 말을 내 입에서 듣고 싶어했고, 나는 둘 다 똑같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새해인데 나한테 그런 소리부터 하는 게 너무하지 않냐며 우스개소리로 포장해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몇 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아빠도 너무하지만, 최근 급격히 심약해지고 있는 아빠를 엄마가 좀 편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나는 무슨 죄냐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에 비하면 참으로 사소한 문제인데,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심각한가보다. 같이 산다는 게 뭘까. 월 무료통화 200분 중 1일이 되자마자 50여분을 엄마의 하소연을 듣는데 사용했다. 내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고 하는 엄마완 달리, 나는 갈수록 약해지고, 기대고 싶어하는 엄마,아빠 생각에 심란해졌다. 서른이라는 숫자는 별 감흥이 없는데, 가까운 사람들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게 실감난다.

서울의 조금 더 중심가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도 좋은 위치(서대문)에,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월세, 괜찮은 방을 단번에 얻었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서러움을 느끼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더 좋은 것은 같이 살게 된 두 사람. 앞으로 살다보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오면 따뜻함을 느끼게 해줘서 참 좋다. 서울에도 가족이 생긴 기분이다. 25년을 지내왔던대로 언니와 동생이 있는 구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이사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된 내 성향. 어떤 장소에서든 잘 적응한다는 것. 새로운 사람들은 낯설지만, 새로운 장소는 두렵지 않다. 아니 새로운 장소에서도 귀신같이 내 맘에 편안함을 주는 점을 찾아내고 털석 주저앉는 것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집 어딜가도 내 집처럼 편히 지낸 것 같기도하다. 민폐가 되기도 했겠다. 누군가의 흔적이 담긴 장소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연말이 되면서 2010년을 어떻게 지내왔나 되돌아보았다. 이렇다 저렇다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하다보니 금방 1년이 가버렸다.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부유하던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일에 대한)에 대한 생각들도 조금 가라앉은 것 같다. 여전히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 울컥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송구영신예배에서 본 그 표현만큼 나의 2010년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바람에 흩날리는 겨'

사람도 사물도 일도 가만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내 안의 욕망에 따라 춤을 췄다. 그게 겉으로 다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감출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선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가볍게 마음을 움직였고 그래서 생각을 쌓지 못했다. 행동은 말할 것도 없다. 바람에 흩날릴 정도로 가볍지만 그래도 있는 무게를 모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업들에 쏟았다. 그러므로 생활과 관계에 실을 진중함은 없었다. '겨'의 무게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들이 좋을리 만무하다. 같이 작업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연출한 작업은 결과물이 나오면, 열심히는 했으나 본인이 애초에 가진 것이 없다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2010년이었다. 덕분에 상처입었을 사람, 혼란스러웠을 사람, 서운했을 사람이 차례로 떠오른다. 내색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그런데 더 큰 일은 아직도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것이다. 해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달라지는 게 없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새해가 되었으니, 굳은 다짐을 해봐도 좋으련만, 굳은 다짐을 해버리면 바람에 날리지 못할까봐 밀쳐두는 나를 발견했다. 아직도 놓지 못한 것이 많나보다.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만두고 싶다. 허나 순간적인 욕망들, 감정들을 삼키지 못한다. 두리번두리번. 푸른 언덕의 나무처럼 내 자신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면 좋으련만, 거기까진 아직 너무 멀다는 느낌이 든다. 단박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겠지.

이런 감정들이 한 해를 정리하면서 으레 하는 과장된 자기반성이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생략한 디테일들이 자신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래도 푸른 언덕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꿈꿔야겠지? 꿈꾸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 이 정신없는 비행을 견딜 수 없을테니까. 올해는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정도에는 흩날리지 않을 무게를 가지고 싶다. 날리지 않는 모래 알갱이라도 되어주길...Happy new year!


Posted by cox4 :